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가등록문화유산 우암동 소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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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 소막마을이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소를 수탈하기 위해 우역검역소와 소 막사를
설치해둔 곳으로 피란 시절 빈 막사에서 하루하루 버틴 실향민
애환이 묻어나는 곳

오시는길

목적에 따라 취향에 따라 즐기는

소막마을 주변관광지

  • 우암동 도시숲

    부산 남구 우암동 12

    051-607-4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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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향성당

    부산 남구 장고개로16번길 13

    051-632-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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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평화기념관

    부산 남구 홍곡로 320번길 106

    051-90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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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제동원역사관

    부산 남구 홍곡로 320번길 100

    051-629-8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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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민이 만든 마을 A village made by refugees
'우암동' Uam-dong
우암동은 '우암'이라는 포구안의 언덕에 위치한 큰 바위가 소 모양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나, 이 바위는 1930년대 매축공사로 없어졌다.

우암동 피란민 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수출하는 소를 검사하던 검역소가 출발이었다(1909년). 부산이출우검역소에는 소막사 19동과 소각장 등 건물 40여 동이 배치되고 한 번에 1,400~1,600두를 수용하는 등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였다.

검역을 위해 사육하던 소막사 등 약 40여 동의 공간이 비교적 넓어 해방 후 귀환 동포와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수용소로 활용되었다. 또한 1.4 후퇴 후 피란민이 증가하고, 휴전 이후 거제도 등 부산 인근의 피란민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피란민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Uam-dong is said to be named after a large rock on the hill inside the port called “Uam” which resembled the shape of a cow. However, this rock was removed during the reclamation work in the 1930s.

The Uam-dong refugee village began as a quarantine station for cows before they were shipped out to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1909). There were 40 buildings at the Busan Cattle Quarantine Station for International Trade which included 19 cattle sheds and an incineration facility. The station could accept 1,400 to 1,600 cattle and was the largest in the country.

The 40 buildings, including cattle sheds, used for quarantine were relatively spacious and were repurposed as shelters for returning Koreans after the liberation and a refuge for refugees during the Korean War. To meet the increasing number of refugees after the Third Battle of Seoul (1951), as well as refugees near Busan and Geojedo Island after the armistice, the people gathered here and formed the refugee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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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소넋 위로한 탑 a comforting tower for a victimized cow
'소 위령탑' *Korean cow memorial tower
혈청소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일제는 1909년 이곳 우암동에 '수출우역검역소'를 설치하였다. 2년 뒤인 1911년에는 암남동에 '우역 혈청제조소'를 창설하였다. 당시 한반도에는 소에 치명적 바이러스질환인 우역이 창궐하여 80%까지 폐사하는 등 기근과 경제적 피해로 이어졌다.

이에 일제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모든 한우에 대해 검역 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우역면역혈청을 제조하기 위해 위 두 기관을 설립하였다. 당시 백신 제조를 위해 실험실에서 죽어나간 동물의 수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는 1922년 암남동에 세워졌으며 혈청 제조를 위해 희생된 많은 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가을바람이여, 한 생명을 죽여 많은 생명을 살리는구나. 나무아미타불'로 해석할 수 있다.

The Rinderpest Serum Manufacturing Facility has a history of over 100 years.
The Japanese Empire established the Export Cattle Quarantine Station in Uam-dong in 1909 and the Rinderpest Serum Manufacturing Facility in Amnam-dong two years later.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time suffered from an outbreak of rinderpest, a deadly viral disease for cattle, which led to famine and economic damage due to the perishing of 80% of cattle. In response, the Japanese Empire established these two institutions to ensure that all Korean cattle exported to Japan undergo quarantine procedures and to manufacture rinderpest immune serum. Records say that there were a significant number of animals that died in the laboratory at the time of manufacturing vaccines.
This monument was erected in Anam-dong in 1922 to console the spirits of many cattle sacrificed for the serum production.
It can be interpreted as “Autumn wind, sacrificing one life to save many lives. Namu Amita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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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역에서 우암선까지... From Busanjin Station to Uam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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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 일대 the area of Uam-dong
매축 공간의 성격 변화 Changes in the Characteristics of the Embedded Space
우암동 앞바다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적기만 매축 사업'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이 매축 사업은 1934년 4월 문현동 앞바다를 시작으로 해서 1937년 8월에 마무리되며 우암동, 감만동 일대 앞바다에 이르는 약 12만평 정도의 공간을 육지로 변화시켰다. 매축지에는 저유 시설, 위험물 보관창고, 공장시설 등이 들어서 인근 지역의 조선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수익이 있기도 하였지만, 위험한 사고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경유하는 시점에 이 공간은 미군이 점유하게 되면서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물자 보관, 저장, 운송 공간으로 적극 활용된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길과 그 주변 일본군 부대시설을 점유한 미군들은 이 공간을 군사적 전략 지역으로 활용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을 전후한 시점에 우암동의 매축 공간 역시 대부분의 영역이 민간 산업영역으로 운영 주체가 바뀌어 갔다. 이러한 성격 변화 속에서 우암동의 매축 공간은 각종 창고 시설이 입주하게 되고,창고와 연관된 물류운송회사들이 그 영역을 확보해갔다. 더불어 부산항 수출입 물류유통이 점차 확산되면서 주민들의 활발한 부두 노동참여로 이어졌다.

우암동 포구에 들어오는 물류는 주로 연안에서 올라오는 농산물이나 석탄, 고철, 무연탄 등의 우암동 일대 공장에 사용되는 공업용 원자재, 그리고 위험화물이 많았다고 한다.


The reclamation of the coastal waters of Uam-dong was in full swing through the Jeokgiman Bay Reclamation Projec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This reclamation project began in the coastal waters of Munhyeon-dong in April 1934 and completed in August 1937. About 397,000 m² of coastal water from Uam-dong to Gamman-dong was transformed into land. Oil storage, hazardous materials warehouses, and factories were built on the reclaimed land, providing economic benefits to nearby Koreans, but they were always exposed to the risk of accidents. This area during the Korean War was occupied by the US military and actively utilized as a space for storage and transportation of materiel.

The US military utilized the railway buil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 Japanese military facilities in the vicinity as an area for military strategy. Most of the reclaimed land in Uam-dong changed its operation into a private industrial area after the war and around the 1960s.

Amidst these changes in characteristics, the reclaimed land became home to a variety of warehouses, where logistics and transport companies related to the warehouses dominated the area. In addition, residents actively engaged in wharf labor as logistics and distribution of imports and exports in Busan Port gradually expanded.
Logistics entering the Uam-dong port mainly consisted of agricultural products from the coastal area or industrial raw materials and hazardous materials used in local factories, including coal, scrap metal, and anthrac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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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막사 구조모형(일제강점기) Structural Model of Cowshed (Japanese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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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부산수출우검역소의 설립 the establishment of Busan Exported-cow Quarantine Service
조선시대 우암동은 한적한 포구마을이었다. 시기를 알 수 없으나 당시 표류한 일본인들의 송환에 앞서 임시로 수용되던 '표민수수소가 설치되어 조선과 일본 연안에서 어로 생활을 하던 표류민이 임시 체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육식 장려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육우에 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일본 소는 체구가 작아 경작에는 활용할 수 있었으나, 사역용으로는 부적합하였다. 이에 식용 목적의 유럽 소보다 경제적이고, 사역 및 식용으로 활용 가능한 조선 소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이러한 배경 아래 조선소의 대일수출은 1876년 개항과 동시에 부산항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1879년부터 일본에서는 우역을 예방하기 위하여 조선소를 검역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농업조직 및 경제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훈령을 통해 조선소의 종자 보존과 개량 및 증산계획을 세웠고, 이후 1909년 7월 10일 법령 제21호 '수출검역법 제정·시행됨에 따라 수출우검역소가 설치되게 되었다.

1909년 우암리에 부산검역소가 설치된 이유는 부산항과 마주하고 있고 부산진에서 약 10km 거리에 위치하여 시각적 감시가 가능하면서도 공간적으로는 격리된 위치였기 때문에 검역소 입지로는 적절하였다고 판단된다. 부산에 이어 1925년에는 인천, 진남포, 원산, 성진, 1937년에는 포항이 추가되어 5개 항에도 추가로 검역 시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출항검역소는 해당연도 우역의 위험성에 따라 검역일수를 약 7일에서 20일 범위로 조절하여 제도적 수출무역을 진행하게 되었다.


Uam-dong during the Joseon dynasty was a quiet port village. Although the exact period is unknown, the temporary shelters for castaways were established before the repatriation of the Japanese castaways, and they were used as temporary residences for castaways who were making a living by fishing along the coasts of Korea and Japan. After the mid-19th century, the Meiji government of Japan promoted the meat consumption promotion policy, which led to the rapid increase in the demand for beef.

Japanese cows are small in size and could be utilized for cultivation, but they were not suitable for consumption. Thus, there was a higher preference for Korean cows which are more economical than European cows and could be utilized for labor and consumption. The export of Korean cows to Japan through Busan Port began as soon as the port opened in 1876. Starting in 1879, Japan conducted quarantine inspections of Korean cows to prevent the spread of rinderpest. The Governor-General of Chōsen established a plan for breed conservation, improvement, and increased production of Korean cows in an order suggesting policy directions for Korean agriculture organizations and the economy. Subsequently, the Export Quarantine Act (Act No. 21) was enacted and enforced on July 10, 1909, which led to the establishment of export cattle quarantine stations.

The quarantine station for Busan was established in Uam-ri in 1909, as it was determined to be an appropriate location due to its characteristics of facing Busan Port and being about 10 km from Busanjin-gu, allowing visual surveillance of the area as a geographically isolated location. Following Busan, five additional quarantine stations were established in Incheon, Jinnampo, Wonsan, and Sungjin in 1925 and Pohang in 1937. These quarantine stations carried out systematic export and trade within about 7 to 20 days of quarantine depending on the risk of rinderpest in the given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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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매입, 검역 그리고 반출 The purchase of cow, Quarantine and Export
피란민 마을로의 변화 Transformation into a refugee village
개항기에는 주로 동래, 부산, 양산, 절영도 등 부산인근 시장에서 소의 매입이 이루어졌으나 교통편이 발달하면서 원거리 이동도 적지 않았다. 조선 상인들이 범내골에 위치하였던 부산진 상설가축시장에서 소를 사거나, 전국의 우시장에서 소를 사서 열차로 부산진역에 도착하여 검역소로 운반해왔다.
검역소에서 12일간 사육하면서 소독과 매일 오전 오후2회 체온 검사하고 채혈 검사를 하여 합격한 소에는 소뿔에 부산검역소의 "S"자 확인을 표시하여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이때 결함이 있거나 병든 소를 검역소 화장장에서 태워버렸다.
우암동 이출우검역소의 사무실 위치는 현재의 남부 중앙새마을금고 본점 북서쪽의 우암번영로에 위치한 양지아파트 부지에 있었다고 하며, 주위인 우암로 장고개로, 동항로 사이에 23,725평의 부지에 일시에 2,500두의 소를 수용할 수 있는 소막사인 19동의 축사, 사무실, 창고 사택 등 총 52동 4,028평의 건물이 있었다.
부산이출우검역소는 광복 후에야 이출업무가 중지되었고, 축사는 빈 상태로 남았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우암동의 빈축사 건물에 3~5평을 얻어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During the port opening period in Korea, the majority of cow sales took place at markets near Busan, including Dongnae-gu, Busan, Yangsan, and Jeoryeongdo Island, but there were also long-distance travels with the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Korean merchants purchased cows at the Busanjin Livestock Market located in Beomnaegol or cattle markets across the country. They transported the cows via train and brought them to the quarantine station upon arrival at Busanjin Station.
During the 12 days at the quarantine station, disinfection and temperature checks took place twice a day—in the morning and afternoon. Cattle that passed the blood test were marked with the “S” symbol of the Busan Quarantine Station and exported to Japan.
Any cattle with defects or disease were disposed of at the crematorium in the station.
The Uam-dong office of the Export Quarantine Station for International Trade was located on the current site of Yangji Apartment at Uambeonyeong-ro northwest of the South Samaeul Geumgo Headquarters. There were 52 buildings with a total area of 13,000 ㎡, which included 19 cattle sheds for 2,500 cattle, offices, warehouses, and residential buildings, on the 78,000 ㎡ of land between Uam-ro, Janggogae-ro, and Donghang-ro.
The Busan Cattle Quarantine Station for International Trade halted exports after liberation (1945), and the cattle sheds were left empty.
Following the liberation, a small village was formed here as Koreans returned home from Japan and acquired empty cattle sheds (10 ㎡ to 17 ㎡) in Uam-dong and began residence there as a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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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Japanese colonial rule
이출항검역소로의 변화 Change to Quarantine Station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본에 병합됨에 따라 부산수출우검역소를 담당하였던 '한국흥업주식회사'는 '조선흥업주식회사'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수출우검역소'도 '이출우검역소'로 변경되었다.
당시 검역소의 시설은 17,000평의 부지에 1동마다 약 127두를 수용할 수 있는 우사 5동과 측면부에 사료소가 있었고, 뒷부분에는 병든 소를 격리하는 ‘격리소’ 영역과 우측에는 실험을 위해 소를 해부하는 '해부소‘가 건설되었다. 검역소의 우사 형태는 목조 기와 맞배지붕의 건물로 폭 약 9m, 길이 약 50.9m의 장방형 평면구조의 건물이다.

이후 1919년까지 총 14동우사를 추가로 신설하여 그 규모를 확대하였으며, 1919년도에 전반적인 시설을 갖추고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1920년대에 이르러 수출량 증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시설 규모를 확장함에 따라 해변 일대를 부분 매립하게 된다. 1934년 4월 말에 진행된 제1기 매축 공사는 우암동 해안가, 일명 적기만으로 부르는 지역을 매립하여 1937년 8월에 준공되어 검역 시설 확충이 이루어졌다. 이는 도로와 도시기반시설 계획이 추진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1943년에 이르러서는 이와 같은 적기만 일대의 산업용지 및 항만·군사 시설과 연결하는 철도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부산부 중심의 항만시설과 부산진의 중심시설과 기반시설과 연결이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1909년 초기 127두 수용 규모였던 시설이 확장되어 최대 2,280두까지 수용 가능한 최대규모의 이출우검역소가 되었다.


Following the annexation of Korea by Japan on August 29, 1910, “Korean Heungeop Corporation” changed its name to “Joseon Heungeop Corporation” and the “Export Cattle Quarantine Station” to “Cattle Quarantine Station for International Trade.”
At the time, facilities in the quarantine station were constructed on 56,000 ㎡ land with five cattle sheds, each capable of housing 127 cattle; feed storage areas at the sides; the quarantine area at the rear to isolate sick cattle; and dissection area at the right for dissecting cattle for experimentation.
The cattle sheds at the quarantine station had wooden structures with a gable roof. The buildings were about 9 m wide and 50.9 m long with a rectangular floor plan.
By 1919, the area expanded as 14 cattle sheds were additionally constructed, and it is presumed that the quarantine station was operational and fully equipped with necessary facilities in the corresponding year. Parts of the seashore were reclaimed to expand the facilities in response to the increase in exports in the 1920s.
The first phase of the reclamation project was commenced in late April 1934 along the coast in Uam-dong, the area known as “Jeokgiman Bay.” The project ended in August 1937 and thus expanded the quarantine facilities. This indicates that plans for roads and urban infrastructure were carried out.
By 1943, railway facilities connecting parts of industrial sites to port and military facilities in Jeokgiman Bay were completed, which resulted in connecting core facilities and infrastructure in Busanjin and the port facilities at the center of Busan-bu.
The facilities that each housed 127 cattle in early 1909 were expanded in this process and became a Cattle Quarantine Station for International Trade with a scale of housing up to 2,280 c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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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부터 6.25 한국전쟁기 the Korean War period from the liberation of Korea
우암동에 정착한 피란민들 Refugees who settled in Uam-dong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이출검역소와 소막사는 광복 이후 귀한동포들의 생활공간으로,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이주한 피란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이자 마을로 변화하였다.
6.25 한국전쟁 당시 우암동에는 소막사, 천막 130여 동, 판자촌 15동 등으로 구성된 피란민수용소가 설치되었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들인 극장, 공장 등을 차출하여, 남구 적기에 위치한 일제 강점기 소 수출 검역소, 영도의 대한도기, 영도 해안가, 영도 청학동, 대연 고개, 남부민동, 괴정 당리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모두 합쳐도 7만 명가량을 겨우 수용하였기에 급증한 피란민들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트러스 지붕틀과 목구조를 통해 대공간의 형성이 가능한 '소막사는 기존 용도와 관계없이 대규모 수용이 가능한 피란기 거주용도로 전용되었다. 소막사에는 보통 370여 세대가 살았고, 햇빛이 통하지 않아 위생시설이 불량했다.
당시 이주된 귀환 동포들은 가족수에 따라 가구별로 우사 내의 적정면적을 배당받았으며, 피란민들은 소막사가 있던 수용소에 들어가서 살기도 하고, 천막 수용소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 외 근처 빈터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피란민들이 만드는 판잣집은 크지 않았다. 한 가족이 6.6m2~9.9m2(2~3평)의 공간만 있어도 충분했다. 만들 수 있는 재료가 귀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땅 욕심도 내지 않았다. 이웃에 다른 피란민이 오면 자신의 땅을 내어주는 미덕도 있었다. 고향에 대궐 같은 집들을 두고 내려온 피란민들에게 이런 주거 시설이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전쟁 탓으로만 돌릴 뿐이었다.
피란환경에서 피란민이 건축행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건축재료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흙, 나뭇가지, 대나무와 같은 자연형 재료였다.


The quarantine station for international trade and cattle sheds establish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became a living space for Koreans returning home after the liberation and turned into a residential area for refugees who migrated to Busan during the Korean War.
During the Korean War, the refugee camp was established in Uam-dong with 130 cattle sheds and tents and 15 shanties.
Refugee camps were established in 40 areas including the export cattle quarantine sta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located in southern Jeokgi, Daehan Ceramic Ware in Yeongdo-gu, the coast of Yeongdo-gu, Cheonghak-dong in Yeongdo-gu, Daeyeongogae Pass, Nambumin-dong, Goejeong-dong, and Dangni-dong. Temporary theaters and factories that can accommodate many people into refugee sites were also assigned.
But these areas in total could only accommodate 70,000 people and were far insufficient to take in the sudden inflow of refugees.
Cattle sheds were capable of large-scale accommodations as they created large spaces using their truss roof and wooden structures. Thus, these sheds were repurposed into residential spaces for refugees. Typically 370 households lived in a cattle shed with poor sanitary facilities and no sunlight.
Koreans who returned home at the time were assigned an appropriate floor area within the cattle shed depending on the number of family members. Refugees lived in cattle sheds or tents in the refugee camps. Some also built shanties on empty land nearby.
The shanties built by refugees were not big;
6.6 ㎡ to 9.9 ㎡ of space was enough for one family.
Materials to build one were rare, but they believed they could soon return home. Therefore, they did not have desires for land. In fact, they even offered their land whenever there were other refugees coming as their neighbors. It was probably miserable for the refugees who left their grand homes in their hometowns to have to live in such meager housing. But all they could do was turn the blame for everything on the war. Building materials that refugees could use for construction were easy to find from nature, which included mud, branches, and bamb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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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牛舍)를 차지한 Occupy the Cowshed
피란민들 Refugees
소막에 자리를 잡은 피란민들은 소막 내부에 통로를 만들고 가마니, 이불 등으로 공간을 구분하며 함께 지내다가 이후 내부통로를 기준으로 가운데 벽이 만들어지고 양쪽으로 여러 채의 집이 자리 잡았다. 수용소자리에 만들어진 판잣집은 3면의 벽을 옆집, 뒷집과 공유하며 붙어있었기에 벽으로 창문을 낼 수 없어 채광, 환기에 취약하였다.솟을지붕이 있었던 집은 이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Refugees who settled in cattle sheds lived together by creating passages inside and dividing the space using straw bags and blankets. Later, walls were built based on the internal passages, and various houses were established on both sides. Shanties built on refugee camp sites did not have windows as three walls were shared with the next-door neighbors. These residences lacked light and ventilation, but houses with monitored roofs made use of these drawb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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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시기 Industrialization period
소막마을의 변화 Changes in Somak Village
6·25전쟁 이후 우암동 소막마을은 주변에 주요한공업시설들이 자리하게 되면서 귀환동포와 피란민들이 떠난 판잣집에 인근 공장의 노동자들이 생활하기 위한 마을로 점차 변화되었으며, 마을 경관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용당동의 '동명목재', 우암동의 '성창기업'과 '조선선재', 문현4동의 '광명목재 그리고 인근의 방직공장,신발공장등 공장들이 새롭게 들어서거나 또는 급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공장이나 부두와 가깝고 집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우암동에 많은 노동자가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수용소 일대와 산비탈에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1960년대 우암동에 많이 설립된 공장은 제면, 목재, 블록, 정유, 창고 등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창고와 정유는 매축지 부둣가에 설립된 것으로 보이고, 그 외는 대부분 우암동 마을 내에 설립되었다. 성창목재를 필두로 한 목재공업이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1979년에는 목재공업과 연계된 재제업과 가구업이 등장하였고 양말공장도 등록되었다. 오늘날 우암동 주민들이 기억하는 대표적인 생산시설은 성창목재와 양말공장, 철사공장 등이다.


Major industrial facilities were established near Somak Village in Uam-dong after the Korean War, and shanties that refugees and Koreans left gradually transformed into a village for workers at nearby factories, changing the village landscape to its current appearance.
As industries advanced with the start of the Korean government's first five-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in 1962, there was new establishment or rapid growth of factories including “Dongmyeong Lumber” in Yongdang-dong, “Sungchang Enterprise” and “Chosun Welding” in Uam-dong, “Gwangmyeong Lumber” in Munhyeon 4-dong, and nearby textile and shoe factories.
Many workers gathered in Uam-dong where it was close to the factory or the port and offered relatively cheap houses. They prepared their residence at the refugee camp site and hillside. Many factories established in Uam-dong in the 1960s can be categorized as noodle manufacturing, lumber, concrete block production, oil refining, and warehouses.

Warehouses and oil refineries were established at the quayside of reclaimed land, while others were located within Uam-dong. The lumber industry led by Sungchang Lumber consumed a significant labor force at the time. The lumbering business and furniture business associated with the lumber industry rose in 1979, and sock factories were also registered.
The residents of Uam-dong today recall Sunchang Lumber, sock factories, and wire drawing mills as the major production facilities during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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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방을 거쳐 through the owner's room
세들어 살았던 다락방 rented attic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슬레이트가 등장하여 판자나 루핑 위에 슬레이트를 덧대기도 하면서 점차 벽돌, 블록 등으로 집을 개축하였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기에도 비좁은 공간에 다락방을 만들어 노동자에게 세를 주기도 하였다.
수용소가 맞배지붕이었기에 지붕구조의 ㅅ자보와 기타 지지부재를 절단하여 높이를 확보하였으며 이러한 공간이 바로 주인방을 거쳐 세를 놓았던 '다락방'이다.
이렇게 우암동은 일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몰려든노동자들의 불안한 삶을 수용해주었다.


Slates were introduced when Saemaeul Undong (a political initiative to modernize the rural Korean economy) was in full swing in the 1970s. These slates were added to boards and roofing, and houses were gradually reconstructed with bricks and concrete blocks.
Residents made an attic even when they were living in cramped spaces and rented the room to workers.
Since the refugee camps had gable roofs, residents cut the v-shaped rafters and other supporting members to increase the height and make room for the attic, which was rented out and accessed through the main room.
As such, Uam-dong embraced the unstable lives of workers who gathered in search of a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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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일을 찾아온 사람들로 바글바글 rented attic
피란민들 가운데 여성은 소막사 근처에 형성된 시장에서 장사하며 생계를 꾸렸다. 바느질해서 옷을 만들기도 하고, 포목전, 식당 등을 비롯한 온갖 생필품은 여성들의 손을 거쳐야 했다. 소규모 양말 공장에 다니면서 결혼 자금을 마련했던 아가씨들도 있었다. 남성들은 성창목재와 광명목재, 철사 공장, 부두, 부두 하역장 등에서 젊음을 쏟아부었다.
막노동하며 맺었던 인연이나 시장통에서 장사하며 만들어진 계 모임들이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Women refugees made a living by selling in the market near cattle sheds. They sewed to make clothes, ran fabric stores and restaurants, and made all kinds of daily necessities. Young women also worked at a small sock factory to collect money for marriage.
Men devoted their youth at Sungchang Lumber, Gwangmyeong Lumber, wire drawing mills, docks, and cargo handling docks. They formed relationships from their manual labor and kitty party while selling in the marketplace, which continues even to the presen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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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항성당과 하 안토니오 신부 Donghang Cathedral and Father Ha Antonio
마을 사람들이 우암동에 정착하는 데에 동항성당이 큰 도움을 주었다.
1951년 천막으로 만든 임시 성당으로 출발한 이 성당은 1959년 하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해 오면서, 피란민뿐만 아니라 일을 찾아 우암동으로 올라온 도시 이주민들에게도 각종 구호활동을 펼치면서 오늘날까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식량난에 허덕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연명할 수 있게 했고, 임산부를 위한 조산원을 비롯한 의료 지원, 어린이집과 같은 교육 사업으로 마을 사람들이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Donghang Catholic Church offered great help to village residents settling in Uam-dong. History of this church began as a temporary church made of a tent in 1951. Since Monsignor Anton Trauner was appointed in 1959, the church has been part of the memories of the village residents to this day as they conducted various relief activities not only for refugees but also for urban migrators who came to Uam-dong looking for a job. The church offered significant support for residents in settling by providing corn porridge to ensure they have meals during food shortages, medical support such as a maternity nurse for pregnant women, and education such as a daycare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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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 사람들의 문화생활 Cultural Life of Uam-dong People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산업기에 우암동 피란민들 에게도 문화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옛 동원극장이 자리하였던 흔적은 우암동 새 시장 골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 훌륭한 극장은 아니지만, 지역 사람들의 대표적인 유흥 놀이 공간이었던 동원극장, 주변의 미군부대와 부두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술집이 즐비했던 우암동 일원은 6~70년대는 잘나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남구 일원에 있던 공단이 점차 떠나면서 그 힘을 잃고 그때의 모습에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There was a cultural space for even refugees in Uam-dong during industrialization, although the exact period is uncertain.
The traces of the old Dongwon Theater can be found in the new market alley in Uam-dong.
Although it is not an exceptional theater, the Dongwon Theater was a representative entertainment venue for the residents, and Uam-dong between the 1960s and 1970s was a thriving place with numerous bars for nearby US military bases and dockworkers.
But after the relocation of the industrial complex in Nam-gu, the theater lost its energy and hasn't changed much in its appearance since t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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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의 구조적 원형과 시설구조가 보존된 내부 벽체 Internal walls that preserve the structural originality and facility structure of the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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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Build
내부 벽체구조의 흔적 Traces of internal wall structure
소막사는 피난민 주거건축으로 활용되면서 가마니, 이불 등으로 최소한의 공간분할을 하여 사용하였다. 피란기 당시 소막사 내부 활용과 관련 재료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초기 피란민들은 소막사 내부에 통로를 만들고 가마니, 이불 등으로 공간을 구분 하였으며, 이후 가운데 벽을 만들고 양쪽으로 세대를 형성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1950년대 중후반기부터 피란주거가 장기화 되면서 본 건물의 바깥벽과 내부 칸막이벽에 '외엮기 흙벽'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도 일부 벽에서 195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흙벽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외역기의 옷가지는 대나무 또는 단면 30~50mm×10mm의 가느다란 나무각재가 새끼줄로 엮여져 있으며 외를 중심으로 양방향 각 20mm 두께로 흙이 발라져 있다.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흙벽의 일부는 철거되지 않고 그 위에 바로 시멘트 모르타르 미장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벽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샛기둥을 설치하고, 띠장을 연결하여 합판으로 마감한 붙임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3년 불하가 이루어지고 부터는 각 개인 또는 주민들에 의해 수급 및 시공이 용이한 콘크리트 블록 조적벽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점차 공간 확장 및 구획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공간 활용면에서 방해가 되는 기존 소막사 목구조 기둥이 점차 훼손되기 시작하면서 내부 조적벽체가 일부 내력벽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Cattle sheds were utilized as residential structures for refugees, where they divided minimal spaces using straw mats and blankets.
According to the records on the use of the cattle sheds’ interior and related materials during the refugee period, the early refugees made passages inside the cattle sheds and divided the space with straw mats and blankets. They later built walls in the middle of the passage to form households on both sides.
According to testimony, it seems that the “interwoven mud-plastered walls” were widely used for exterior walls of the building and interior partitions as the refugee residence became more prolonged from the mid to late 1950s.

Even today, numerous mud-plastered walls were found that are presumed to have been built in the late 1950s.
The material for interweaving consists of a thin scantling (30 to 50 mm x 10 mm in cross-section) or bamboo that are interwoven with twines, and a layer of mud is plastered on the outer layer at about 20 mm thickness from both directions from the center of the lath.
Some parts of the mud-plastered walls were not removed during the period of economic growth and were instead plastered with cement mortar.
Some walls are attached walls in which studs were installed between pillars, connected with wales, and were finished with plywood.
Since the disposal of vested property in 1963, individuals or residents gradually expanded and partitioned the space to its current appearance of concrete block masonry walls that are easier to supply and build. The internal masonry walls became a supporting structure as the timber columns of the original cattle sheds began to rot, hindering the usage of the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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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재료 활용의 지혜 Traces of internal wall structure
  • 피란환경에서 피란민이 건축행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흙, 나뭇가지, 대나무와 같은 자연형 재료 사용
  • 당시 전쟁과 복구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용이하게 수집 가능한 아연도금 강판과 같은 간이 가설건축용 재료/기존 건축물에서 수집이 가능한 기존 목구조 부재와 합판, 다다미 등의 재사용도 빈번히 나타남
  • 이후 장기 주거화가 이루어진 이후부터는 특별한 도구 없이 스스로 부분적인 축조가 가능한 시멘트와 벽돌, 블록을 활용한 공간 확장 및 수직 증축 등의 건축행위가 이루어짐


  • Refugees utilized natural materials such as mud, branches, and bamboo, that were easy to find for construction in a refuge
  • There was also frequent reuse of existing wooden structural members, plywood, and tatami (a Japanese-style mat) floors that could be gathered from existing buildings or simple temporary building materials, such as galvanized steel sheets, that were easy to collect during the war and restoration
  • Due to the prolonged residence, there were constructions such as space expansion and story increase using cement, bricks, and cement blocks that could be partially constructed by themselves without needing a special t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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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 소막마을의 Uam-dong Somak Village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 Meaning as a modern cultural heritage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암동은 또다시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 1980년대 초반에 들이닥친 두 번의 석유파동으로 우암동 일대의 기업과 공장들이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하게 되면서 소막마을 일대의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따라서 소막마을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이주하였고, 마을의 인구는 점차 감소하였다. 이로 인해 일부 공가들이 생겨났으며, 일부 거주자들은 옆집을 사들이거나, 전면 및 측면으로 공간을 증축하기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암2동 골목 안의 집들은 크게 다른 형태로 바꿀 수 없는 공간적 한계선상에서의 탈바꿈을 꾀해 왔고, 그로 인해 1층보다 더 넓은 2층, 사다리를 놓은 다락방, 밖으로 나온 연탄, 가스보일러 등 특수한 형태가 나타났다. 여전히 이곳에는 생활 변화에 맞게 개조한 소막사 하모니카 집들과 공동화장실, 우물터들이 우리 곁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이들 건축물의 구조적 원형과 시설구조가 잘 남아있어 보존의 가치가 높다. 또한, 소막마을의 경우 역사 속 피란민들의 삶의 지혜가 잘 나타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화 시기 인근 지역에 조성된 공장, 항만 등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입된 노동자들의 생활공간들이 오늘날까지도 그 기능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Uam-dong faced another transition as it entered the 1980s.
Due to the two oil crises in the mid-1970s and early 1980s, companies and factories in Uam-dong faced serious financial problems, and factories in Somak Village had to close.
Workers residing in Somak Village moved to find new jobs, which led to a gradual decline in the village population.
Consequently, there were a number of vacant homes, and some residents either purchased their adjacent properties or expanded their space by adding to the front and sides of their homes, as seen in the present day. Spatial transformation of cattle sheds

Houses in the alleys of Uam 2-dong have attempted to transform within the spatial limits that could not be greatly altered. Accordingly, the area features houses with bigger second floors than the first floor, an attic with a ladder, and a briquette boiler or gas boiler placed outside.
There are still cattle shed harmonica houses modified according to lifestyles, public restrooms, and wells that remain intact near the residential area. These structures in particular have a high value in preserving, as the original structure of the buildings and facilities are still intact. Somak Village also represents the refugees’ wisdom of life in history.

Furthermore, the value as a modern cultural heritage can be attributed to the village since the residential areas of workers that migrated to this region to work at factories and ports established in the vicinity during the industrialization period continue to serve their functions to thi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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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 소막마을의 Uam-dong Somak Village
건축적 생활사적 가치 Architectural and life history values
한국전쟁의 피란민들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가축을 위한 공간을 고쳐서 삶의 터전으로 삼아왔다는 사실은 건축사의 측면에서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전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소막사의 구조적 변용은 경제성장기 도시 노동자의 삶을 담은 생활사의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The fact that refugees during the Korean War modified the space for livestock in the provision capital of Busan and used them as residences is an important historical record in architectural history. In addition, the ongoing structural modifications of cattle sheds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hold value as history that portrays the lives of urban workers during the period of national economic grow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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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풍경, 우암동 Uam-dong Somak Village
우암동 소막사는 일제강점기 축산자원을 수탈한 역사적 현장이자, 한국전쟁기 피란민이 주거로 사용하는 등 부산만의 독특한 주생활사의 현장이다. 또한 경제성장기 경제 발전의 축을 담당해온 노동자의 주거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The cattle shed area in Uam-dong holds historic value in that livestock farming was exploi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 space was occupied by refugees during the Korean War. It clearly represents the unique residential lifestyle of Busan. The cattle sheds were also the homes of workers, who have played a pivotal role in national economic development.